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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스물하나 기본정보

1998년 IMF 시대에게 꿈을 빼앗긴 청춘들의 방황과 성장을 그린 청량 청춘 케미스토리.

1998년, 세상이 통째로 흔들리듯 불안하던 해, 스물둘과 열여덟이 만났다.
둘은 서로의 이름을 처음 불렀다.
스물셋과 열아홉이 되었고, 둘은 의지했다.
스물넷과 스물이 되었고, 둘은 상처를 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됐을 때, 둘은 사랑했다.

시대를 막론한 영원한 스테디셀러, 청춘.
비록 지금의 청춘이 입시와 스펙, 학자금 대출과 취준생 같은 이름으로 사회면에나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됐을지언정
나도 당신도, 모두가 청춘을 사랑한다.
청춘인 자들도, 청춘을 앞둔 자들도, 청춘을 지나온 자들도 하나 같이 청춘을 동경한다.

왜일까.
청춘이 매력적인 근본은, 남아도는 체력에 있다.

무언가를 좋아할 체력, 좋아하는 것에 뛰어들 체력, 뛰어들었다가 실패하고 좌절할 체력, 그 와중에 친구가 부르면 나가 놀 체력, 그래놓고 나는 쓰레기라며 자책할 체력.

유한한 체력을 중요한 일들에 신경 써서 분배할 필요가 없는 시절, 감정도 체력이란 걸 모르던 시절, 그리하여 모든 것을 사랑하고 모든 일에 아파할 수 있는 시절.
그 시절의 우정은 언제나 과했고, 사랑은 속수무책이었으며, 좌절은 뜨거웠다.
불안과 한숨으로 얼룩지더라도, 속절없이 반짝였다.

이 드라마는 '청춘물'할 때 그 '청춘'.
우리 기억 속 어딘가에 필터로 보정해 아련하게 남아있는 미화된 청춘, 우리가 보고 싶은 유쾌하고 아린 그 ‘청춘’을 그릴 것이다.
살벌하게 불태웠다 휘발되는 이야기 말고, 천천히 적시다 뭉클하게 새겨지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 스물다섯 스물하나 인물관계도

- 스물다섯 스물하나 등장인물 소개

- 나희도 18세 / 현. 41세
● 태양고 펜싱부 / 펜싱 국가대표 선수


나희도의 유서 (19세)
오늘은 1999년 12월 30일, 내일이면 지구가 멸망한다는 헛소리를 믿는 건 아니다. 열아홉은 그 정도로 순진한 나이가 아니다. 알 거 다 아는 나이지. 그래도 혹시 몰라 적는다. 좀 살아보니 인생은 혹시 모르는 일들이 폭죽처럼 팡팡 터진다. 그러니 보험 정돈 들어 두는 것이 좋겠지. 지구가 멸망한 후 혹시 살아남은 인류가 이 유서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으니 내가 깨달은 인생의 진리 세 가지를 남긴다.
인생은 한방이다. 때문에 한방에 훅 가기도 한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터진다. 세상은 결국 혼자 사는 거다. 셋 다 직접 경험으로 터득한 진리다. 물론 경험으로 터득하고 싶지 않았다. 후.. 어쨌든 세부적인 설명 들어가겠다. 아, 물론 지구가 멸망한다는 헛소리를 믿는 건 아니다.

[챕터1] 인생은 한방이다. 때문에 한방에 훅 가기도 한다.
내 인생의 한방은 내가 신동이었다는 것이다. 펜싱 신동. 칼을 든 지 8년 만에 국가대표가 되었다. (물론 잠깐 못할 때 있었는데 생략하겠음) 어쨌든 그것이 펜싱 신동의 서막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 고유림과 함께 아시안게임 결승전에 진출했다. 펜싱 신동의 몰락이었다. 왜 몰락이냐고? 올림픽 메달리스트 고유림을 꺾었지만, 분명 몰락이다. 판정시비가 있었고, 나는 기자회견장에서 패기 넘치게 깽판을 쳤다. 음.. 그렇게 4천만 안티를 거느리게 됐다. 인생 한방에 훅 가는 순간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열 받네. 판정도 경기의 일부라며! 그 판정이 고유림 편이면 괜찮고, 내 편이면 안 되는 거야?! 왜! 내가 라이징스타 고유림 앞길을 막아서?? 후.. 지구가 멸망해선 안 된다, 적어도 올림픽이 열리기 전까진. 나는 증명할 거다. 4천만 안티들에게 제대로 보여줄 거다. 고유림을 당당히 꺾고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금메달의 영원한 주인이 있다면 그건 나다.
[챕터2] 세상은 결국 혼자 사는 거다.
그 사건 이후로 엄마한테도 못 받고 자란 관심, 4천만에게 한꺼번에 받았다. 그것도 열렬히. 아, 엄마도 관심을 주긴 줬다. 아주 재수 없는 방식으로. 사실 놀랍지도 않다. 아빠가 돌아가신 날에도 뉴스를 하러 간 사람이니까. 텅 빈 장례식장에서 나 혼자 아빠의 곁을 지켰다. 아빠가 불쌍해서 많이 울었다. 그 이후로 나는 펜싱에만 몰두했다. 오른쪽 팔이 더 길어지고, 오른쪽 다리가 더 굵어지도록. 칼끝에 집중할 땐 엄마를 미워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래, 세상은 결국 혼자 사는 거다. 응원, 격려, 위로.. 엄마도 안 해주는데 누가 해주겠어.
[챕터3] 나쁜 일은 한꺼번에 터진다.
고유림을 동경했었던 적 있었다. 그 애와 함께 운동하고 싶어서 태양고로 전학까지 왔다. 그게 첫 번째 나쁜 일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생각하면 혈압이 오르는 아시안 게임 결승전. 그게 두 번째 나쁜 일이었다. 세 번째 나쁜 일은, 그토록 미워 죽겠던 고유림이 어쩐지 측은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애가 나한테만 나쁜 년이란 걸 알았을 때, 나 빼고 모든 사람에게 다 착하다는 걸 깨닫게 됐을 때,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아.. 아니다, 이 얘긴 그만하자. 고유림, 난 죽을 때까지 너를 잊지 못할 거야. 넌 내게 일어난 가장 나쁜 일이면서 가장.. 벅찬 일이다.
그래도 태양고에 와서 좋은 건 내 우상, 양찬미 선수를 코치쌤으로 둘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양찬미의 ‘양’이 양아치의 '양'일 줄은 몰랐지만. 아, 지승완과 문지웅도 만났다. 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미친 애들이라 좋았다. 그 애들이 날 응원하고 있다. 그리고,.. 백이진도 만났지. 풀하우스 11권을 몰래 빌려주던 책 대여점 알바생이자 아침마다 신문을 넣어주는 신문 배달부. 그리고 지금은.. 내 인터뷰 한 마디에 목숨 거는 얼빠진 신입 기자. 너는 칼을 드는 사람이라 적이 많나 보다. 근데 때론 펜이 칼보다 강해. 믿어봐.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위로가 된 적 있었다. 음.. 그러고 보니 엄마한텐 아니더라도 나는 나름의 응원, 격려, 위로를 받고 있었네..
[챕터2]는.. 재고해 볼 필요가 있겠다. 알아서들 하시길. 방금 백이진한테서 문자 왔다. 내가 아까 보낸 문자의 맞춤법을 지적한다. [가끔 칼 대신 펜을 들어보는 건 어때?] 란다... 열받는다. 지구가 멸망하는 마당에 그깟 맞춤법 좀 틀리면 외않되?
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구가 멸망한단 헛소리를 믿는 건 아니다.
유서 끝.

 

- 신재경 44세
● UBS 9시뉴스메인앵커 & 희도엄마


신재경의 유서 (45세)
지난주 우리 방송국 교양프로에서 종말론에 대해 다뤘다. 시청률 38%. 사람들은 세상이 끝나길 바라는 걸까. 아니면 세상이 끝날까봐 불안한 걸까. 아니다. 적어도 여기서는, 사람들 말고 나에 대해 쓰자. 이건 뉴스가 아니라 유서니까.
나는 무얼 바라기에 20세기 끄트머리에서 16세기 사람의 예언 따위를 의식하는가.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걸 너무 많이 보며 살았다. 매일매일 시시각각, 그 모든 일들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게 내 일이었다. 만약 지구가 멸망한다면, 그걸 뉴스로 전할 수 있을까. 아주 잠깐 속보라도 전할 수 있다면, 내가 멸망을 맞이하는 곳은 희도의 옆이 아니라 또 방송국이겠구나. 희도 아빠를 떠나보낼 때처럼,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도에게 상처겠구나.

희도가 빨리 크길 바랐다. 희도에게 난 엄마이기 전에 항상 언론인이었다. 희도 네가 펜싱선수여서 슬퍼도 아파도 경기에 나가야 하듯이, 나는 앵커여서 슬퍼도 아파도 뉴스를 전해야 한다는 걸 하루라도 빨리 이해 받고 싶었다. 그런데 희도는 나를 이해했을지언정 용서하지 않는다. 언제나 상황은 희도와 내 사이를 이렇게 만든다. 나를 증오하는 희도를 이해한다. 나를 증오하는 찬미 역시 이해한다. 희도의 코치 선생님으로 찬미를 만났다. 찬미는 내 커리어의 모든 처음이었다. 그녀와의 모든 과정들이 첫사랑처럼 설레고 결국 아팠다. 그리고 배웠다. 누군가와 친해지지 말자. 특히 취재원과 우정을 쌓지 말자. 나는 그 사람의 약점을 전 국민에게 떠벌릴 수 있는 사람이다. 필요하다면, 해야 하는 사람이다.
누군가에겐 배신이고 누군가에겐 상처인 나의 직업을 탓하지 않는다. 내가 잃은 만큼 세상은 조금 나아졌길 바랄 뿐이다. 다만 염치없게도 용서 받고 싶다. 가끔은 이해받고 싶다. 내 소중한 사람들로부터.
예언가의 말을 믿지 않는다.
다만 멸망이라는 명분에 기대 진심을 말하고 싶었다.
내 진심은 뉴스에 나오지 않으니까.

 

- 양찬미 44세
● 태양고 펜싱부 코치


양찬미의 유서 (45세)
아까 오후 훈련 시간에 희도한테 내일 지구 멸망한다는데 오늘 너 뭐할 거냐고 물었다. 희도는 지구가 멸망한다는 헛소리 같은 건 안 믿는다고 했다. 멸망할 수도 있지 귀여운 새끼. 한 치 앞도 장담할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요놈아. 그러니 나도 유서를 써본다. 근데 유서엔 뭘 적어야 하나?

요즘은 꽤 즐거웠다. 희도가 전학 오고 나서부터 팀 분위기도 달라지고 활력이 돈다. 아주 서로들 이기려고 아득바득이다. 옛날 생각나고 좋더라. 나도 니들만큼 치열했던 순간들이 있었지. 운동으로 시작해 운동으로 끝나던 그 지긋지긋한 날들 말이다. 으으.. 토 나와. 그래도 올림픽에서 메달도 따고 주목도 받고, 대통령이랑 밥도 먹고.. 많은 영광을 누렸다. 재밌었지. 사람들은 은퇴한 선수들을 측은하게 본다. 인생의 전성기를 모두 누려버려서 앞으로 빛날 일이 없는 퇴물로 생각한다.

건방진 시선이지. 인생의 전성기를 나만큼 눈부시게 누려본 적도 없는 것들이. 나는 늘 현재를 산다.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현재를 산다. 난 지금 잔잔하게 흘러가는 내 인생이 좋다. 운동선수 말고 온전한 ‘나’로 살 수 있는 이 시간들이 좋다. 아주 쏠쏠해~ 음~
말이 나와서 말인데 자식새끼 뒷바라지하는 학부모들 보면서 결혼 생각 접힌 것도 같다. 코치 생활하다 보니 학부모들이 진짜 끝내주게 귀찮게 한다. 아니 누가 잘해 달랬나? 자기들이 먼저 멋대로 잘해줘 놓고 국가대표 안 뽑았더니 꼬투리 잡아 나를 국가대표 코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참나.. 그걸 또 뉴스에다 대고 떠들어 재낀 게 무려 신재경이고. 난 걔랑 우정이 있는 줄 알았다. 개 같은 기자 새끼들. 그 후로 언론에 학을 뗐다. 근데 그 신재경이 희도의 학부모로 나타났잖아. 너무 대단한 분이 되셔서 존댓말 할 뻔했잖아..

난 희도가 좀 짠하다. 신재경이 희도한테 어떻게 대하는지가 불 보듯 뻔하다. 선수 생활, 그것도 국가대표라는 게 얼마나 힘든 건데.. 그래. 내가 더 잘해주면 되지. 흑표범새끼 같은 게 귀엽잖아 나희도. 너 나 땜에 펜싱 시작한 거 다 알아 인마. 생각해보니 지구 멸망은 안 될 말씀이다. 애들은 아직 덜 누렸다. 그 고된 생활에 마땅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야.
아, 그리고 멸망 안 되는 이유 하나 더. 지난주에 초고속인터넷 깔았다. 이름하야 ADSL!!!! 이제 사무실에서도 스타크래프트를 할 수 있다는 뜻이지. 흐흐..
그러니까 지구 멸망 같은 소리 하지 마.
나 게임 해야 돼.

- 백이진  22세
● 만화책 대여점 알바생 / UBS 스포츠 기자


백이진의 유서 (23세)
내일이면 지구가 멸망한다고 절절하게 믿고 있는 동생이 강요해서 쓴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걸 믿는다는데, 동생은 지구가 멸망하길 바라는 걸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집안은 풍비박산 났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유복하고 귀여웠던 우리 막내는 한순간 낯선 친척 집 다락방 신세가 됐다.

삶이 계속되는 것보다 지구가 멸망해버리는 게 막연히 낫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
IMF는 예상보다 엄격하게 우리 집을 초토화시켰다. 엄마는 포항으로, 아빠는 군산으로 몸을 숨겼다. 빚이 옮아갈까 봐 이혼도 하셨다. 서로 극진히 사랑하시는 두 분은 요즘 하두리캠으로 눈물의 상봉을 하신다. 군대 간 지 6개월쯤 됐을 무렵, 국가는 나에게 제대를 명했다. 지금은 나라 말고 네 가정을 지키라고. 가족을 먹여 살리라고. 가족은, 국가가 나에게 부여한 책임이었다.

꿈은 사치였다. 아무 회사나 닥치는 대로 면접을 봤고, 결국 날 받아준 건 방송국이었다. 면접 때 신재경 앵커가 나에게 물었다. 꿈이 뭔가요. 옆에 있던 면접생들이 대답했다. 정직한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앵커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우리 가족이 다시 모여 사는 게 꿈입니다. 기자는 아픔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하고 내가 그 자질을 가지고 있어 뽑힌 거라고 나중에 신재경 선배가 말해줬다. "니가 산일건설 장남이라며? 군대는 아버지가 빼줬냐?" 스물셋에 방송국 기자가 됐더니 선배들이 비아냥대며 물었다. 생계 유지 곤란에 의한 의가사 제대라고 설명하자, "몰락한 도련님이네." 그랬다. 어쩐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가끔 '도련님'의 순간과 '몰락한'의 순간이 교차했다.
요즘 선배는 나를 미친놈이라고 부른다. 사실 올해처럼만 살고 싶다. 올해 나는 선배가 시키면 뭐든 다 했고, 뭐든 다 됐다. 잠복 취재할 땐 화장품 외판원이 됐다가, 경호원이 됐다. 또 아시안게임이 열리니 급히 스포츠 기자가 됐다. 나는 스포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나 지금은 펜싱 해설도 할 수 있다. 집에 쌓인 빚보다, 슬픔에 잠긴 가족보다, IMF보다.. 선배가 무서웠다.

제대 후 만난 사람 중에서 제일 인상적인 사람은 단연 나희도다. 시대도 가정도 그 애의 꿈을 짓밟았지만, 아주 멋지게 반항했다. 물론 반항의 방법은 기가 찼지만.. 어떤 무엇도 내 꿈을 방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 애에게 많이 배웠다. 온 국민이 그녀를 매도하던 날, 나는 그 애도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다친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다. 그 애가 만난 세상은 모두 이런 식이었겠지. 신재경 선배가 희도의 엄마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그 후로 나는 희도의 비하인드 씬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되었다. 그 예의 없는 돌대가리가 이해가 됐다. 걔의 싸가지 없는 말솜씨를 자꾸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욕심이 생겼다. 보는 눈 없는 곳에서 희도가 흘린 땀과 부상, 외로움 같은 것들을 세상이 좀 알았음 싶었다. 펜싱에선 상대와 거리유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기자도 같다. 취재원과의 거리 유지가 중요하다. 그 애와 나는 가까웠으나, 가깝지 않아야 했다. 희도와 나 사이의 거리는 몇 뼘이 정답일까. 아직 신입이라 잘 모르겠다. 지금 이 거리가 실수라면, 그건 내가 아직 신입이라서길. 날이 저물어간다. 옆에서 함께 유서를 쓰고 있는 내 동생은 정말 진지해 보인다. 뭐라고 적는 걸까. 지구가 멸망하지 않으면 유서를 읽어보겠다고 해야겠다.

그보다 내 동생 이현아. 지구가 멸망하는 것보다 삶이 계속되는 게 훨씬 좋은 거야.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보여줄게. 삶이 그 자체로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운지. 그전에 너부터 우리 집으로 데려올게. 같이 살자, 약속해. 방금 희도에게 문자가 왔다. 또 맞춤법을 틀렸다.
외않되..라니.. 이건 정말 못 참겠다.
가서 얼굴 보고 따져야겠다.

 

- 백이현 15세
● 재원중


백이현의 유서 (16세)
스피노자도 오늘이 되면 사과나무 심겠다는 한가한 소리는 못할 것이다. 그는 진짜 멸망을 경험해본 적이 없지. 이 순간 나는 그보다 우월해진다. 나는 지구의 멸망을 목격하는 최초의 인류가 될 테니까.

오늘 뭘 할지 충분히 고민했고, 엄마 아빠는 너무 멀리 있어 못 보니까 형을 만나러 왔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 데도 별수 없이 가족을 찾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미약함이다. 아니, 오만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위대함이다. 17년 인생을 종합해보자면 괜찮은 삶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그것은 나의 삶에 대한 태도에서 기인한다.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의 가르침대로 겸손하게 살았다. IMF로 집이 어려워졌지만 이런 과정 또한 인간이기에 누릴 수 있는 역경이리라.
쓰다 보니 느끼는 사실인데, 나의 글 실력이 부쩍 는 것 같다. 이 모든 건 DJ 완승 누나의 덕이다. 누나가 추천해준 책들을 읽었더니 인생에 대해 좀 알 것 같다. 완승 누나는 내 완벽한 이상형이다. 아, 지금 유명해진 DJ 완승의 해적 방송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이 방송을 청취자 5명 시절부터 들었다. 이제 와서 완승 누나 좋아하는 애송이들이 우습다. 지금은 청취자 500명을 넘어간다. 내 안목에 경의를 표한다.
유서를 길게 쓰고 싶지 않다.
기록은 곧 왜곡이다. 왜곡된 나를 남기고 싶지 않다.
멸망이 좀 더 가까워졌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는가. 간다는 건.. 무엇인가.

- 고유림  18세
● 태양고 펜싱부 / 펜싱 국가대표


고유림의 유서 (19세)
지구가 멸망하는지 안 하는 진 모르겠지만 연말이다. 연말은 어쩐지 기분이 따뜻해진다. 크리스마스 트리도 예쁘고 조명도 반짝거리고 거리에서 나오는 캐롤도 듣기 좋다. 그러니까 유서를 빌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근데 진짜 멸망할 수도 있으니까 모두 살아있을 때 내일 읽어줘야지, 히히.

부모님께.
엄마 아빠. 유림이에요. 엄마는 지금쯤 분식집 문을 닫고 설거지를 하고 있겠고, 아빠는 고속도로 위에 있겠네요. 밤 운전 조심하고 있죠? 생각해보니 지구가 멸망하면 절대 안 될 거 같아. 내가 엄마 아빠 호강 시켜준다고 그랬잖아요. 아직 못 시켜준 호강이 많이 남아서 안 되겠어. 엄마는 맨날 없는 집에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다 그러지만, 난 엄마 아빠랑 함께 있으면서 행복하지 않았던 적이 없어요. 고생은 내가 고생 더 시켰지 뭐. 빵꾸난 펜싱 장갑이랑 재킷이랑.. 그 바늘도 잘 안 들어가는 걸 엄마가 맨날 꿰매줬잖아요. 고생 시켜서 미안했어요. 하고 많은 운동 중에 돈 많이 드는 운동 해서 그것도 미안해요. 난 엄마 아빠가 너무 자랑스럽고,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아, 물론 사랑하는 건 당근이고!

지웅이에게.
난 평생 운동부로 살아서 학교는 곧 체육관이었어. 나머지 공간들은 늘 묘하게 낯설었어. 다른 인생을 사는 다른 아이들의 다른 공간. 나는 이방인이었지. 그런데 복도에서, 매점에서, 교실에서 자꾸자꾸 니가 나타났어. 너는 나에게 체육관 안과 밖의 경계를 지워준 사람이고, 학교가 얼마나 재밌는 곳인지 알려준 사람이야. 그리고 니가 데려가준 세계가 나는 정말 눈물겹도록 좋았어. 언제나 내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지웅아, 너를 만난 건 정말 기적이야. 오래도록 함께 하자 우리.

마지막으로 희도에게.
처음에 네가 우리 학교로 전학 왔을 때, 내가 쌀쌀맞게 굴어서 상처 많이 받았지? 미안해. 넌 내 인생 최초의 두려움이었거든. 아마 네가 전학 온 순간, 나는 예감했던 것 같아. 네가 두려워질 일이 다시 한 번 생길 거란 걸. 그래서 최선을 다해 너를 싫어했어. 역시나 예감은 적중했고, 아시안게임 이후로 언론은 우리 둘을 붙여놓길 좋아했지. 라이벌이라 부르다가 악연이라 부르다가 지들 마음대로 우릴 가지고 놀았지.
그런데 희도야. 어떻게 우리가 악연일 수 있을까. 나는 너를 이기려고 노력하고, 너는 나를 이기려고 노력하면서 우린 끝없이 강해졌지. 어떤 경기든, 가장 마지막 경기에 서 있는 사람은 너와 나였어. 그럴 때마다 우리의 결승전은 내 자부심이었고, 너에 대한 존경이었고, 나에 대한 신뢰였어. 너와 나는 칼끝을 겨누고 있었지만, 나한텐 모든 순간이 우리였어. 올림픽까지 1년 반 남았다, 희도야. 전 세계가 우리의 경기를 지켜보게 하자. 그때도 펜싱 마지막 경기는 우리 둘의 차지일 테니까. 언론이 우리를 갖고 놀았던 것처럼 그땐 우리가 언론을 갖고 놀자. 여전히 사이가 안 좋은 척해 볼까? 아니면 사랑한다고 말할까? 뭐가 됐든 생각만 해도 신나. 물론 금메달은 내가 딸 거야! 히히.
근데 희도야, 이건 너한테만 털어놓는 말인데,
나 요즘 펜싱이 잘 안 돼. 왜 안 되는지 잘 모르겠어서 더 지치는 거 같다.
이 또한 지나가겠지? 진심으로 그랬으면 좋겠다.

- 문지웅 18세
● 태양고
● 그 시절 인플루언서


문지웅의 유서 (19세)
신이시여 듣고 계신가요? 갑자기 19년 만에 처음으로 불러서 죄송합니다. 내일 지구를 멸망시킬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알겠는데요, 조금만 늦춰 주시면 안 되나요? 제가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거든요. 아직 싸이월드 투멤남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건 진짜 제가 올해 가장 열심히 한 부분이거든요. 이대로 죽으면 도토리로 환생할 거 같거든요.. 얼마치를 샀는데 내가.. 아니 사실 투멤남 선정 기준이 너무 얼굴 쪽으로만 몰려있어서 저 같은 진짜 패션 리더들이 손해를 보고 있거든요. 다가올 21세기는 개성과 스타일의 시대잖아요. 님은 신이니까 알고 계시죠. 근데 신은 무슨 옷 입어요? 왠지 프라다 입을 거 같아.. 부럽네요. 저도 루이비통 지갑 사려고 돈 모았다가 그냥 캠코더 샀거든요. 그게 저의 예술세계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혹시 모르잖아요. 저도 투헤븐 같은 끝내주는 뮤직비디오 찍을 수 있을지.

휴.. 캠코더 산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멸망이라니. 멸망할 줄 알았으면 할부로 사는 건데.. 예, 알았어요. 굳이 멸망을 시켜야 속이 시원하시겠다면.. 그래요. 뭐 나름 괜찮은 인생이었던 것 같네요. 나와 동시대에 자우림이, 마이클 잭슨이, 장국영이 살았어요. 축복이었죠. 영감 많이 받았습니다. 고마웠어요. 나의 아티스트들.
내 옆엔 태어날 때부터 승완이가 있었어요. 부모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랑하는 친구이자, 내 영원한 스캔들 상대. 걔는 항상 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줬어요. 그동안 고마웠다, 사랑하는 내 친구. 그리고 희도를 만났고, 이진이 형도 만났네요.

가장 중요한 건 유림이를 만났습니다. 하아.. 님. 진짜 멸망 안 하시면 안 될까요? 저 아직 유림이한테 고백도 못했습니다. 지구 멸망보다 고백했다 까이는 게 열 배는 무섭습니다.. 유림이 같은 국가대표 슈퍼스타가 절 좋아할 가능성이란 게 존재하긴 합니까? 그치만 진짜 지구가 멸망할 지도 모르니까, 내일은 고백해보려 합니다. 저 까이면.. 그땐 약속대로 멸망 시켜주셔야 합니다. 오케이? 멸망이 쪽팔린 것보단 나으니까요.
근데.. 고백도 까이고 멸망도 안 하면.. 저는 어떡하죠?

- 지승완  18세
● 태양고
● 전교1등이자 반장, 그러나 가슴 속엔 반항심으로 가득 찬 잔다르크


지승완의 유서 (19세)
해적방송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DJ완승입니다. 오늘은 1999년 12월 30일, 인터넷 윈앰프 방송으로 여러분과 함께 한 지 딱 500일 되는 날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소식, 예언가들에 의하면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네요? 그 멍청한 사람들의 말을 믿는다 치고, 오늘은 저의 유서로 방송을 시작해보겠습니다.

이 시대에 대해 생각한다. 사회에 대해 생각한다. 사회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한다. 정부와 정책까진 아니더라도 열아홉인 나에게 학교가, 교사들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한다. 야간자율학습이라는 이름을 달고 행해지는 강제타율학습과, 권위를 폭력이라는 형태로 남용하는 교사들과, 개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하고 일률적인 사람을 찍어내는 공장과도 같은 학교의 시스템에 대해 생각한다. 기회랍시고 주어진 기회 아닌 기회들과, 선택이랍시고 주어진 선택 아닌 선택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이 방송을 통해 수많은 문제들에 질문을 던졌고, 청취자 여러분들은 공감했고 화답해주었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했다. 희망이 없다. 이런 사회라면 멸망해도 괜찮을 것 같다. 멍청한 예언가들의 예언을 응원한다. 이곳은, 닫혀도 되는 세계다.
해적 방송 12월 30일 첫 곡입니다.
메탈리카의 Master of pupp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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